농식품부는 31일 이재욱 차관 주재로 긴급 상황점검회의를 열어 인천 강화군, 강원 인제군 등 북한과 인접한 10개 시·군을 ‘특별관리지역’으로 지정하고 △방역거점 시설 설치 △멧돼지 포획 기구 배포 △양돈농가 방역 강화 등 위기 경보 ‘심각’ 단계에 준하는 방역 조치에 들어갔다.
대상 지역은 경기 ▲강화군 ▲옹진군 ▲김포시 ▲파주시 ▲연천군, 강원 ▲철원군 ▲화천군 ▲양구군 ▲인제군 ▲고성군이다.
전날 북한이 세계동물보건기구(OIE)에 ASF 발병 사실을 공식 보고한 데 따른 방역 강화 조치의 일환이다. OIE에 따르면 북한 자강도 우시군 북상 협동농장에서 사육하던 돼지 99마리 중 77마리가 ASF로 폐사하고, 22마리는 살처분됐다. 북한 당국이 직접 운영하는 협동농장에서 사육되는 돼지는 260만 마리에 달하는 것으로 추정된다.
아프리카돼지열병(ASF)은 치사율 100%에 육박하는 바이러스성 출혈 돼지 전염병이다. 주로 감염된 돼지의 눈물, 침, 분변과 같은 분비물 등을 통해 전파되며, 돼지과에 속하는 동물에게만 감염된다. 잠복 기간은 약 4일에서 19일이다. ASF가 발생하면 세계동물보건기구(OIE)에 발생 사실을 즉시 보고해야 하며, 돼지와 관련된 국제교역도 즉시 중단된다.
정부는 ASF가 국내에 전파될 가능성이 높은 것으로 판단하고 있다. 작년 8월 아시아 지역 중 중국에서 처음 ASF가 발병한 뒤 국경이 맞닿은 몽골 베트남 캄보디아 등에 차례차례 퍼져서다. 오순민 농식품부 방역정책국장은 “향후 야생 멧돼지 등을 통해 국내에 전파될 가능성은 높은 편”이라며 “감염된 멧돼지를 먹은 독수리 등 야생조류를 통해 유입될 가능성은 낮다”고 말했다. 백신과 치료약이 개발되지 않은 탓에 일단 유입되면 ‘살처분’ 외에는 확산을 막을 방법이 없다. 중국에선 첫 발병 7개월 만에 전체 모돈(어미돼지)의 30%가 땅에 묻혔을 정도로 전파 속도도 빠르다.
특히 아프리카돼지열병(ASF)으로 중국, 베트남 등 여러 아시아 국가가 이미 큰 피해를 본 가운데 특히 북한은 더 취약할 것이라는 우려가 나온다. ASF 확산을 막는데 필요한 방역 역량이 부족할 뿐 아니라 주민들이 육류를 섭취하기 쉽지 않은 상황에서 살처분이 제대로 이행되지 않을 가능성이 있기 때문이다.
유엔 식량농업기구(FAO)와 세계식량계획(WFP)은 지난 3일 '북한의 식량안보 평가' 보고서에서 ASF 위험을 지적하면서 "북한은 시험장비와 물자 부족으로 인해 가축 질병을 발견하고 통제할 역량이 매우 약하다"고 진단했다.
북한 농업·식량 전문가인 권태진 GS&J 북한동북아연구원장도 연합뉴스와 통화에서 "북한은 축산물 분야가 우리보다 약하고 방역체계는 비교하기 어려울 정도로 취약하다"며 "사회주의 국가니까 모든 이동을 차단하기는 쉽겠지만, 기술적으로는 약하다"고 말했다.
북한이 주민들에게 집에서 돼지를 자체적으로 기르는 정책을 장려한 점도 방역을 어렵게 한다.사료 대신 남은 음식물을 돼지에게 주는 게 ASF 발병 원인으로 꼽히는데, 사료는 커녕 먹을 식량도 부족한 북한 주민들은 남은 음식물을 사료 대신 주는 경우가 많은 것으로 알려졌다.
또 군부대나 공장·기업소, 농장 등 비교적 큰 규모로 돼지를 키울 경우 이들 지역을 중심으로 방역망을 구축할 수 있지만, 개별 가구에서 한두 마리씩 키우는 것을 완벽히 통제하기는 쉽지 않다.
더욱이 보이지 않는 바이러스에 대한 두려움보다 당장의 배고픔이 더 큰 주민들이 방역 조치를 제대로 이행하지 않을 가능성도 있다.
ASF가 인체에 해롭지 않다는 이유로 감염된 돼지를 살처분하지 않고 팔거나 폐사한 돼지의 고기를 돈벌이 차원에서 밀매할 가능성도 배제할 수 없다.
한 탈북자는 "북한 주민들은 과거 조류독감 때에도 당국의 눈을 피해 살처분이나 폐기해야 할 가축을 시장 등에서 은밀히 거래하는 경우가 많았다"며 "만성적인 식량난과 먹거리 부족으로 인해 돼지열병 같은 가축 질병 정도는 개의치 않는 게 일반적인 인식"이라고 말했다. 북한 당국도 이런 가능성을 인식한 듯 노동당 기관지 노동신문은 31일 특집기사에서 ASF의 발병과 심각성을 소개했다.